본문 바로가기
인터넷 좋은글 필사

[필사]청중을 파고들려면, 당대 언어로 '관습의 빈큼' 노려라

by 🏞ㅤㅤㅤ 2022. 12. 18.

원글 : 중앙SUNDAY : 오피니언「공부란 무엇인가」by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491155 

 

청중을 파고들려면, 당대 언어로 ‘관습의 빈틈’ 노려라 | 중앙일보

자신의 이야기가 허공에 흩어지는 게 아니라 청중이나 독자의 마음에 가닿기를 염원한다면, 자신의 청중이 누구인지를 떠올리고 그 사람을 위해 말하고 써야 한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자

www.joongang.co.kr

※ 중앙SUNDAY 오피니언에는 이 글 외에도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특히 김영민 교수님 글이 좋습니다.) 두루 살펴 읽어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진실을 알고 싶으십니까!" 누군가 지하철에서 고함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승객들은 애써 그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눈치다. 사람들은 고함을 칠수록 귀를 닫고, 속삭일수록 귀를 기울이는 법. 청중이 듣건 말건 개의치 않고 자기 이야기를 기어이 하고야 마는 이는 상대를 경청하게 만드는 것보다 자신이 말하는 데서 얻는 쾌감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이야기가 허공에 흩어지는 게 아니라 청중이나 독자의 마음에 가닿기를 염원한다면, 자신의 청중이 누구인지를 떠올리고 그 사람을 위해 말하고 써야 한다. 나의 청중이 궁금한 나머지, 나는 매 학기 첫 수업 시간이면 수강생 한 명 한 명에게 자기소개를 요청하고 수강 동기를 묻는다. 당신의 지적 관심은 무엇입니까. 필수과목도 아닌 이 수업을 구태여 수강하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다양하다. 원래부터 정치사상에 관심이 있었어요, 친구들이 권해서요, 수업 시간대가 제 일정하고 맞아서요, 동양이 서양과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어서요, 등등. 이 정도야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이다. 그러나 이건 어떤가. "선생님이 정말 영화배우 전도연씨와 닮았는지 알고 싶어서요." 응? 이건 또 어떤가. "예전에 짝사랑하던 남자 선배가 있었는데요, 고백을 해도 끝내 마음을 안 받아주더라고요.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김영민 선생님 수업이나 들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나버렸어요. 지금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연애를 잘하고 있기는 하지만, 김영민 선생님 수업을 들어야만 완전히 머릿속이 정리될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수업을 수강신청 했어요." 이건 뭐지? 역시 청중과 독자는 그 속을 끝내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존재다.

 

지정좌석제 해야 앞뒤로 골고루 착석

 

수강생의 고민과 열망이 무엇인지 완전히는 알 수 없어도, 이들은 적어도 자발적으로 강의를 들으러 온 학생들이다. 이처럼 동기부여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 말을 건네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이보다 어려운 상대는 무관심으로 중무장한 청중이다. 언젠가 외부 강의를 하러 모처에 가보니, 청중 일부는 강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졸고 있었다. 나는 낙담하지 않는다. 이미 졸고 있다면,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다. 저들은 이미 졸고 있기에 나 때문에 새삼 졸 수는 없다. 따라서 내 강연은 실패하려야 실패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의 무관심에 오히려 크게 위로받았다. 부담을 떨치고 쾌활하게 강연에 임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누군가 '이미' 졸고 있기를 내심 바라며 강단에 오른다.

 

이미 졸고 있는 이들보다 어려운 상대는, 적극적으로 경청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가진 청중, 혹은 매의 눈으로 글을 읽어 기어이 흠집을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앙심을 품은 독자이다. 참석을 안 했으면 안 했지, 굳이 참석해 놓고 적극적으로 경청하지 않으려 드는 청중이 있겠느냐고? 있다. 언젠가 모 대학 채플에 강연을 하러 가게 되자, 비슷한 미션 스쿨을 졸업한 학생이 넌지시 귀띔을 해주었다. 신자가 아닌데도 졸업을 위해 의무적으로 채플에 참석한 학생들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결코 강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반강제로 그 자리에 끌려와 있다는 생각에, 경청하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여긴다고. 그래서 설혹 솔깃한 이야기가 귀에 들려도 결코 경청하고 있다는 내색은 하지 않는다고.

 

다행히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는 청중을 만난다고 해도 난관은 남아 있다. 아이돌 팬 미팅이 아닌 한, 청중 대부분은 강연자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앉으려 드는 것이다. 학생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교수들도 다를 바 없다. 단과대 교수회의가 있는 날이면 맨 앞자리 몇 줄은 텅 비어 있기 일쑤다. 언젠가 법조인 연수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놀라와라, 이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착석하는 게 아닌가. 아 법조인은 역시 다른가, 라고 감탄하는 나에게 앞자리에 앉은 청중이 내게 일러주었다. 이 법조인 연수는 지정좌석제를 택하고 있다고. 앞에 앉기 싫어도 앞에 앉아야 한다고.

 

왜 청중은 강연을 들으러 왔으면서도 강연자로부터 애써 거리를 두려는 것일까? 텅 빈 앞자리는 혹시 안전거리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강연자로부터 무엇인가 받을 용의는 있되, 결코 상처는 받지는 않겠다는 고뇌의 산물이 아닐까? 혹은 여차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 위한 전략적 위치 선정이 아닐까?

 

자신만의 고독한 공간을 확보하고 시작하는 독서와는 달리, 청중은 강연자의 가시권 안에 들어와 있으므로, 청중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층 더 몸을 사리는 경향이 있다. 보호라니? 강연자가 화살이라도 쏜단 말인가.

 

상당수의 독자나 청중들은 자신이 듣고 싶어했던 내용이나 자신이 지지하는 내용이나 자신이 평소 신봉했던 원칙을 강연자나 저자로부터 재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고 지나치게 생경한 것, 생경한 나머지 자신의 믿음을 훼손하는 것, 혹은 자신이 이해하기에 지나치게 어려운 아이디어를 만나면 상처받는다.  심지어 그 새로운 아이디어가 자신의 기득권을 침해라도 할 것 같으면, 청중은 말한 사람을 박해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발화자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불온한 아이디어를 교묘히 숨기기도 한다.

 

때론 '삼가 말하기'가 메시지 전달 효과적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청중이나 독자의 마음에 가닿게 하려는 사람은, 독자와 청중이 가진 관습의 빈틈을 노려야 한다. 당대의 관습에 무지하면, 당대의 익숙한 언어게임에 익숙하지 않으면, 자신의 아이디어를 청중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운 것은 물론, 자신이 가진 불온한 아이디어를 매복시키기도 어렵다. 불온한 생각을 어디엔가 지뢰처럼 숨겨 놓기 위해서라도 당대의 관습과 기대를 숙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강연자는 단지 자신의 머릿속에 든 것을 내뱉는데 그치지 말고, 자신의 강연이 끝났을 때, 강연장을 떠나는 이들 머리에 무엇이 들어있기를 바라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저자 역시 독자가 책을 덮었을 때, 독자 머리에 무엇이 들어있기를 바라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가 독백에 그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발화의 쾌감에 탐닉하기 전에 청중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들의 기대가 무엇인지, 그들의 배경 지식이 무엇인지. 그들의 동기는 무엇인지, 그들의 상상력을 정초하고 있는 관습은 무엇인지, 그들이 강연장을 떠날 때 혹은 책을 덮을 때, 그들의 머리와 심장에 무엇이 남아있기를 자신이 원하는지.

 

이것이 곧 청중의 기대와 예상에 자신의 언설을 맞추거나 독자에게 아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청중과 독자는 결국 자기 식대로 이해한다. 자신의 말과 글이 어떻게 이해될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발화자나 저자는 없다. 다만 기억할 것은 청중과 독자의 반응은, 원래의 말과 글에 대해서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독자나 청중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사실이다. 마치 '악플'이든 '선플'이든 원래 글에 대해서라기보다는 그 '리플'을 단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당장의 시공간에서 베풀어져야 하는 말과는 달리 글은 목전의 청중에 목매지 않아도 된다. 현재의 독자가 아니라, 미래의 독자를 위해 글을 쓸 수도 있다. 저자가 상상의 독자에게 말을 거는 한, 저자는 단지 발화의 쾌감에 탐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언젠가 도래할 자신의 청중을 위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글이 미래에 더는 읽히지 않기를 염원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더는 읽히지 않기 위해 존재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고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글이 깊은 슬픔이나 어두운 진실을 담고 있을 때는, 글쓴이는 결코 진실을 알고 싶냐고 고함치지 않는다. 어떤 메시지는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를 통해서만 비로소 전달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