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글 : 중동고등학교 이명학 교장선생님의 편지(최초 게시글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중동고 학부모님께 드립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제가 부임한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학기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낯설고 힘이 들 때는 세월이 더디 가는 것 같은데, 지나 보면 세월은 저만치 가 있습니다. 지난 학기 동안 학부모님께서 노심초사하신 일이 한두 가지였겠습니까? 아마 '자식이 원수'라는 자조적인 말씀을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끝도 모를 코로나 상황이 계속 이어지니 더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 집이나 그렇지 않은 집이나 모두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어느 집이고 남에게 말 못 할 이야기가 책 한 권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집 부모님은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부러워하시는 부모님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집은 없습니다. 크든 작든, 심각하든 아니든 고민거리는 다 있습니다. 지난달 분당 서현고 학생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면서 학부모님께서도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철렁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마음이 아려오고 '학교'와 '교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이 어린 나이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심적 고통으로 괴로워했겠습니까? 우리나라 교육 현실도 개탄스럽지만, 도대체 '학교'는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을 보면 참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집에서 24시간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성화와 따가운 시선에 억눌려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는 것을 보면 아무리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지만 아직은 어린 학생들에게 가혹한 것 같습니다. 저는 학교만이라도 수업 이외의 시간에 아이들에게 '정신적인 여유'와 '심리적인 안정'을 갖게 하여 답답한 숨통을 잠시라도 트이게 해주고 싶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내 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적이 있으셨는지요? 왜 그런 생각이 드셨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혹 내 체면이 손상되는 것 같아 그러신 것은 아닌가요? 친구는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내 앞에서 신나게 자랑을 하는데 나는 뭔가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있으신지요? 그런데 가민히 생각해 보면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왜 주눅이 들어야 하는지요?
한 인간에 대한 평가의 척도가 공부 밖에 없습니까? 그것 말고도 얼마든지 크고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내 아이가 정직하고 배려 잘하고 따뜻한 공감능력을 지녔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요? 이런 아이는 언제고 제 몫을 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먼 장래 누가 무엇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인간사에 장담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못한다고 계속 못난 길로 가겠습니까? 학부모님의 학창 시절 동기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시면 사실 거기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누군가 변해야 합니다. 아이든 부모님이든. 그런데 저는 부모님께서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몸만 컸지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한 어린아이입니다. 말은 안 해도 아이들도 부모님만큼 힘이 들 겁니다. 그런데 힘이 들어도 기댈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부모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등도 토닥거려 주시고 따뜻한 말씀과 환한 얼굴로 맞아 주시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의 따뜻한 말씀 한마디가 큰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집은 아이가 게임에 빠져 공부도 게을리하고 놀 궁리나 하니 답답하실 것입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야단을 친다고 바뀌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평생 그리 사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직 미숙한 데다가 열정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못해 그러는 겁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따뜻한 말로 소통을 시작하면서 아이의 고민이 무엇인지 그리고 아이의 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꿈이 무엇이든 칭찬해 주시고요. 아이들은 의외로 작은 칭찬에 감동합니다.
<1학년 학부모님께서 아들에게 주는 편지>행사에서 무뚝뚝한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꾹꾹 눌러쓰신 4장의 손편지를 받아보고 눈물을 흘린 학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가정은 서로의 속마음을 확인했으니 모든 일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통해 잘 풀어가겠지요. 부모님께서 먼저 다가가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 아이 흉을 보면 기분이 나쁘시죠? 그건 내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대해 보시면 어떠시겠습니까? 힘은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옵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시지요. 내 아이인데. 믿어보시지요. 내 아이인데. 마이 뭐라 해도 내 아이인데. 소통이 활발한 가정에서 긍정적이고 건강한 아이가 자랍니다. 길게 보고 차근차근 가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아이가 제게 "공부를 못해서 부모님께 죄를 지은 것 같다"고 하더군요. 제가 화가 나서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되물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반성해야 할 일이지 지은 죄는 없습니다. 학부모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아이들은 이런 심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덴마크 부모들은 자식의 연봉이나 직장의 안정성을 걱정하지 않고 아이가 열정을 가지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까를 걱정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이런 세상이 오겠지요. 얼마 전 버스에서 3학년 학생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모님께 짜증 내지 마라. 부모님은 너희보다 더 힘드시다"라고 했더니 빙긋이 웃더군요. 자식들도 자신이 한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다 알고 있습니다. 힘내시기 바랍니다. 옛말 하며 지내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제가 문화일보 칼럼에도 썼지만 '부모 된 죄'라 생각하시고, 지금 첩첩산중에서 한 고개 한 고개 잘 넘고 있다고 학부모님 자신을 칭찬해 주시기 바랍니다. 칭찬받으실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치십니다. 올해는 특히 더 덥다고 합니다.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2021.7.17 교장 이명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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